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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고] 새벽이 동튼다! 현대사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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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기사입력 2020-07-02

  

  © 편집부

 

                       새벽이 동 튼다!!!


   1. 3·1 만세운동의 시발점


서기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미국과 영국 프랑스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전후 처리문제로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이루어졌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패전국 식민지 해결방법으로 민족자결주의 를 제기하였다.


「약소민족도 스스로 국가를 세우고, 선택할 수 있다.는 윌슨대통령의 주장은 고무적인 일로서 약소국들의 독립과 광복의지를 고창하였다.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하자 그 소식을 접한 우리애국지사들은 이때를 조국 광복의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서기 1918(단기 4251)년 김규식, 여운형, 장덕수 선생 등은 신한청년단을 결성하고,「독립청원서」를 작   성하여, 중국에 온 미국의 특사에게 전하는 한편, 서기 1919년에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탄원서 제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파견할 대표로 미국서 공부하고,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 선생을 선발하는 등, 국내외   구국 지사들이 탄원서 제출과 광복 활동을 협의하였다.


서기 1918년 12월 미주지역의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으나, 미    국 당국이 출국 허가를 하지 않자, 미국 대통령에게 3 개항의 청원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그쳤다.


한편, 만주지방에서 광복 활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은 대부분 대종교(大倧敎) 교인들로 조소앙 선생을 중   심으로, 광복군의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정안립, 박찬익, 정신, 유동열, 신팔균 등, 39명이 길림성에서 무오(戊午:1918)년 12월(음력 11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는데, 이를「무오독립선언」이라고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 병탄 후 최초의 독립선언이었다.


뒤이어 일본의 도쿄(東京)에서도 서기 1919년 2월 8일,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중심이 되어「조선독립   청원단」을 결성하고,「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독립선언서(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국제정세를 알고 있는 신한청년단 김규식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구미   외교위원장, 대한독립군단 지휘관으로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선출되었다.


김규식 선생은 제출할 탄원서에 민족의 힘을 싣고자 거국적으로 자주권을 선언하고, 세계에 대한제국   을 알려야 했다. 파리강화회의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대표로서 대한제국의 억울함과 일본의 침략성, 대한   제국이 자주권의 능력이 있음을 세계만방에 알리면서, 파리강화회의에 탄원서를 제출하려고 하였다.


우리 민족, 자주권 의지를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자주독립선언」을 세계 언론에 선포할 필요를 느끼   고, 동지들과 자주독립 선포식 및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때 천도교 교령인 손병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이 만나게 되었고, 두 분이 의기투합하여, 3월 1일을,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의 날로 정하고, 많은 애국지사를 만나게 되었다.
 
최남선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고, 이종일(천도교인) 선생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되어,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손병희 교령은, 이승훈 등, 평안도 기독교계(장로교, 감리교)의 인사들과 불교계의 한용운 스님을 영입   하는 등, 각 종단의 사람들과 은밀히 거사를 논의하면서, 33인의 자주권선언의 대표자를 모았다.


천도교 손병희 교령은 당시 천도교 대교당(안국동)을 건축한다는 명분으로 300만 교인으로부터 자금을   모으고,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의 선봉에 설 지도자를 선출하여 전국에 배치하였다.


서기 1919년 2월 27일, 미리 독립선언서 전문을 배포하고, 만세운동의 인원동원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책임지게 되었다.

 

필요한 자금은 천도교에서 책임을 졌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천도   교 교세가 가장 강했고, 자금도 많았기 때문에 기독교 대표를 비롯하여 불교 대표까지 3‧1 만세 광복 운동의 활동자금은 손병희 선생이 모두 지급하였다고 하였다.


거사 일은 조선총독부의 눈을 속이기 위하여, 일본의 독살로 사망한(서기 1919년 2월 1일) 고종황제의   장례일 2일 전인 3월 1일(토요일) 정오(正午)로 정하였다.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을 하고, 전국적인 조국 광복 운동으로, 비폭력적인 자주 독립선언과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일으킬 지도자로 뽑힌 분들이 33인이었다. 천도교 대표 15명, 기독   교 대표로 감리교 9명, 장로교 7명, 불교 대표가 2명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은 탑골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을 갖기로 학생들과 약속하였으나, 정보가 누설되어 참석하   지 못한 사람도 있고, 일본경시청의 감시로 약속을 지킬 수 없어, 종로 태화관에 모여, 한용운 스님이 만   세운동의 취지를 강연하고, 천도교 이종일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부 대표 들은 바로 일본 경찰에 잡혀가거나, 자수하였다. 또한, 피신하다 체포되어 고통을 당한 분이 더 많았다.


한편, 탑골공원에 모여 대표들이 오기를 기다리던 학생과 백성들은 이러한 소식을 듣고 분노하며, 한    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모인 사람들과 더불어 독립 만세를 부르며, 예정대로 서울역을 향하여 시   가행진에 들어갔다.

 

독립선언을 계기로, 쌓였던 백성들의 반일(反日)감정이 폭발하여, 만세운동으로 확대   되었다. 이때 준비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보급 등은 기독학생과 천도교 교인들의 조직적인 지도와 안내 로 이루어졌다.


만세운동은 각지에서 동시에 터졌고, 이 소식은 전국으로 퍼져 만세 소리가 계속되었다. 대한독립 만세   를 부르며 평화적 시위를 하는 백성들에게 일본 조선총독부 경찰은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살해하고 체포   해갔다.

 
일본 경찰은 서기 1919년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구응(金球應) 선생을 총으로 쏴 죽였고, 4월 15일 화성(華城) 향남(鄕南) 제암리(提巖里)에서는 성인 남자들을 교회에 모아놓고 불을 질러, 죽게 하였으며, 평북 정주(定州) 곽산(郭山)에서는 독립운동가 박지협   을 사살하였고, 대구에서는 만세시위를 벌인 2만여 명 중 113명을 사살하고 87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외에도 일본의 만행은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사살한 사건은 부지기수인 것이다.


조선총독부 경찰 기록에 의하면 만세운동에 가담한 자가 전국적으로 106만 명이고, 그중 사망자가 7,500명이 넘고, 구속자가 47,000이다. 이토록 일본이 짐승 같은 만행을 자행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 이다.
 
   2. 대한민국의 고난과 소련 공산당


해방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시련은 공산국가인 소련의 남하정책과 한반도의 적화 야욕 때문이었다. 미국은 우리를 일본 식민통치를 벗어나게 한 해방군이었다. 그러나 공산국가인 소련에게 일본 관동군   무장해제를 부탁한 것이 큰 실수였다.

 

그때만 해도 미국의 루즈벨트도 소련 공산당의 정체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미국의 협조를 수락하였으나 일본 관동군을 겁내고 있다가, 일본  나가사끼에 원자탄이 투하되자, 전의를 잃어버린, 만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관동군을 물밀 듯이 치고 내려왔다.


그리고, 관동군 해체의 약속을 어기고, 우리나라까지 밀고 내려온 것이다. 북한을 점령하고 남한까지 쳐   내려오려고 하자, 뒤늦게 미국은 소련군 저지를 막으려고 하였으나, 북한에 쳐들어와서 남한까지 쳐내려   올 기세이자 이를 막으려면 오끼나와에 있는 미군들을 한반도까지 와야 하는데, 오려면 시간이 걸리다 보니, 할 수 없이 38선 이북으로 소련군을 퇴각시키게 한 것이, 민족분단과 시련의 시작이었다.


서기 1945년 9월 8일, 미군은 인천에 상륙하여 아베 총독의 항복문서를 받고,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더   불어 조선총독부를 해체하고 9월 10일, 군정을 실시하였다. 남한에는 400개 정당과 30개 이상의 군사단체   가 난립하여 모두가 애국자요, 독립군이었다,


미(美)국 군정은 한국인이 만든 단체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관리와 경찰들을 다시 미 군정의 공무원으로 접수하여, 조선총독부 시절과 같이 치안과 행정업무를 집행하게 하였다. 학교 교육도 그대로 계속하였다. 미군은 군정청을 설치하고 남한을 통치하겠다고 발표하고 군정을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 와서 가진 악행을 저질렀던 일본인은 총독을 비롯하여 군인, 경찰, 공무원, 사업가 할 것 없이, 목숨을 부지하려고, 집이고, 땅이고, 재물을 버리고 맨몸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36년, 아니 40여 년간 일본에 의하여 교육되고, 훈련된 조선인 공무원은 이 땅에 그대로 남았다. 즉, 일본 천왕을 섬기고, 조선총독부에 충성했던 조선인 경찰관, 경찰서장, 군수, 공무원, 판사, 검사    등, 공무원과 교수와 선생들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해방과 더불어 이들은 공포에 떨었다.

 

자기들의 한짓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는 만주와 북한은 소련이 점령하였고, 뒤늦게 미국과 연합   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보니 혼란의 연속이었다.


해방과 더불어 국내 여러 세력이 정당과 사회단체를 만들어 저마다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나라는 혼   란스러웠다. 여운형 등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이영, 정백  등은 장안파 공   산당을 조직하였으며, 박헌영은 서기 1945년 8월 20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장안파를 흡수    통합하였다.


서기 1945년 9월 6일,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인민위원회로 명칭을 바꾸어 조선공산당 박헌영과    손을 잡고, 조선인민공화국 선포와 각료를 발표하는 등, 무정부 상태에서 정부 행세를 하며, 전국 147개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전국을 장악하면서, 일본이 점령한 토지, 공장, 지주의 땅까지 무상몰수하고, 무상 분배하겠다고 선동하자, 공산당을 모르는 국민은 75%가 지지하고 협력하여, 그 세력은 가히 남한을 공산국가로 할 정도였다.

 

이렇게 남한 사회는 북한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와 늦게 들어온 미국과 자유 민주주의 를 지지하는 사상대결로 혼란하였다.


서기 1945년 9월, 조선총독부가 폐지되자,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는 일본으로 도망가면서 남긴 연설문을 우리는 새겨들어야 한다. 일본이 우리에게 심어놓은 식민사관(植民史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아베 노부유키는 일본의 수상직을 거친 인물이다.


    아베 노부유키가 일본으로 도망가면서 남긴 마지막 연설문은 아래와 같다.
      “일본은 졌다. 그러나 조선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란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국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사관을 심어 놓았다.
      결국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 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 일본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 올 것이다.”
          「서기 2011년 행정안전부 민간단체 지원사업체. 정신문화공동체 발행」
           《스토리 텔링이 있는 백년대계 가례보감에서 발췌》


달라진 것은 일본인이 사라지고,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이 우리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친일파의 살길   이 열린 것이다. 미 군정은, 일본에 충성하면서 미국에 대항하였고, 동족을 괴롭혔던 악질 조선인 공무원을 정리하거나 처리할 생각도, 여유도 없었다.
 
미 군정은 치안 유지와 한국 국민을 다스리기에 급급하여, 조선총독부의 조선인 공무원을 그대로 인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의 공무원들은 기득권을 누리면서, 혹시나 동족을 탄압하고, 못   살게 굴었던 내용이 탄로 날까 하여, 상해임시정부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독립군도 모두 개인 자격   으로 들어오게, 미 군정 책임자 하지 장군을 설득하였으며, 자신들의 입지를 지키려고, 일본인에게서 배   운 못된 버릇을 발휘하므로, 내용상 조선총독부가 그대로 연장되었다.
 
   3. 신탁과 반탁운동 및 공산당 반란사건


서기 1945년 12월 27일,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서 3국 외상회의를 가지고, 한국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하여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이 최고 5년 동안 신탁통치   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이승만, 김구 등, 자유 민주세력의 지도자들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신탁통치 반대를 전국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북한의 조선공산당도 처음에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다가, 소련의 지령을 받고는 모스크   바 3국 외상 회의의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렇게 신탁통치를 놓고, 남한과 북한이, 친탁이다, 반탁이다, 하면서 격렬한 대립을 하는 동안 서기 1946년 3월 미‧소 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다시 열렸으나 의견대립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기 1946년 6월, 이승만은 전북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   하였다. 그러나 여운형, 김규식, 김구 등, 중도파는 공산과 민주의 합작 정부를 주장하였다.


남북의 분단을 원하지 않는 민족주의자들은 민족보다 앞서는 것이「맑스-레닌의 공산주의」 사상인 것   을 미처 몰랐기 때문이었다.


민족보다 앞서는 것이 종교요, 사상인 것이다. 왜? 이 사실을 몰랐을까? 지금의 지도자들은 어떨까요? 서기 1946년 미 군정은 치안 유지에 부족한 경찰력을 지원하는 명목으로 2만 5천 명 규모의 병력을 책정하여, 남한의 8개 도청소재지에 각 1개 중대(장교 6명 사병 225명)의 경비   부대를 편성하기로 하였다. 명칭은 국방경비대로 하여 대원을 모집하였다.


당시에 사상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였기에, 사상(공산주의 남로당)검증을 하지 않고, 신체가 건강하다   면 누구나 원하는 자는 모두 입대시켰다. 이때 남로당원들은 학력이 있는 자는 장교로 지원하고, 학력이 부족한 자는 일반 사병으로 지원하였다. 물론 남로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서기 1946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지금의 태릉: 육군사관학교)에서 1개 중대(제1 연   대)를 창설한 것을 시작으로, 8개 도청소재지에 각 1개 중대씩을 편성하였으며, 공덕리의 제 1연대본부에   남조선 국방경비대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전국 8개 부대를 관장하게 하였다.
  
서기 1946년 6월 15일, 국방경비대를 조선경비대로 개칭하였으며, 총사령부 밑에 인사, 정보, 작전교육,   군수국의 일반참모부와 재정처, 의무처, 법무처, 감찰감실, 통신과 군감대를 두었다.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는 서기 1947년 12월 1일까지 그 예하에 3개 여단(서울, 부산, 대전)을 창설하여 해당 지역에 위치한 각도   의 연대들을 통괄하게 하는 한편, 계속하여 6개 연대와 2개 여단을 추가로 창설하였다.

 

조선경비대는 국가의 중요시설(항만, 미군부대 등)의 경비업무와 공산당의 크고 작은 폭동진압 업무를   수행하였다.


서기 1946년 6월부터 위조지폐 범인들의 조사와 재판이 시작되고, 박헌영이 위조지폐 사건에 연류 된   사실이 밝혀지자 남로당원들은 위조지폐 사건을 은폐하려고, 노동자들을 부추겨 폭동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이에 서기 1946년 7월 을지로 화물자동차 파업을 주도하였고, 서기 1946년 9월 23일, 한국노총 4만   여 명이 철도노조 파업을 일으켰다. 서기 1946년 10월 조선공산당 주도 대구폭동사건을 일으켜 경찰 38   명, 공무원 163명, 일반 국민 73명이 사망하였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서기 1947년에 서울에서 다시 열렸지만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났다. 미소 공동위원회   가 결렬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유엔은 미국이 제안한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총선거   를 결정하고, 그 준비를 위해 서기 1948년 1월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거부로 38선 이북에는 유엔 임시위원단이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에 유엔은 소총회를 열   어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총선거를 시행하도록 결정하였다. 여전히 김구나 김규식 선생 등은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공산주의를 모르고, 남한의 단독정부를 반대하   며, 북한을 가고 왔지만 아무 성과 없이 고생만 하였다.


남한은 유엔의 결정을 따라 서기 1948년 5월 10일, 38선 이남 지역에 단독선거가 시행되었다. 5.10 선거는 우리나라에서 실시된 최초의 민주주의 선거로 성인 남녀 모두가 참여하여, 지역을 대표하   는 국회의원을 뽑았다. 북한과 제주도를 제외한 곳에서 실시되었다.


제주도에서는 유엔감시 하에 5.10 민주 선거를 방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소위 남로당에 의한 제주도   4.3 폭동이요, 반란 사건이었다.

 

북한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원 김달삼을 비롯한 350여 명의 인민   해방군은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장하고, 제주도 내 12개소의 경찰지서를 급습하여, 경찰관을 죽이고, 지서 를 불태우면서, 「김일성 군대가 목포까지 내도(來到)하였으니, 안심하고 싸워라.」고, 선동하면서, 순경 1 만 원, 형사 2만 원, 경위 이상은 3만 원의 현상금을 걸고, 경찰관 살해를 촉구하였으며(당시 쌀 한가마니 가격 300원), 「곧, 토지를 무상 몰수하여 무상분배가 시작된다.」 고, 제주시민을 선동하면서, 경찰, 공무원 가족을 위시하여, 인민위원회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들을 반동으로 몰아 무참하게 죽이는 폭동사건이 일어났다.

 

서기 1948년 4월 3일,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유엔감시 하에 총선거를 반대하는 남로당이 제주도에서 무장 폭동사건을 일으키자, 제주도에 주둔 중이던 제 9연대를 투입하였으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   고, 확대되자,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제 14연대를 제주도로 급파하기로 하였다. 제 14연대는 제    주도로 가기 위하여 12월에 여수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14연대는 제주도로 떠나지 않고, 장교였던 지창수와 김지회를 중심으로 남로당 병사들은 12월   19일, 「동족을 살해할 수 없다. 친일파를 처단하라. 38선을 철폐하고, 남북통일을 이루자.」는 등, 구호 를 내걸고, 제주도 출동명령을 거부하고, 이에 반대하는 장교들을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경찰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전 14연대 사병들을 집결시켜 놓고, 선동과 위협으로 반란에 가담하게 하였다. 반란군은 여수경찰서와 관공서를 장악하고, 여수의 공산주의자를 모아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반공주의자요, 자본가 계급(부르조아)이라고 생각하는 경찰과 공무원 가족을 비롯한 500여 명을 살해하였다. 

 

「동족을 살해할 수 없다.」고, 구호를 외친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무참하게 동족을 살인하는 만행을 어떻   게 생각할 것인가?   


이것이 공산당이다. 제 14연대는 이웃 순천을 순식간에 장악하고, 곧바로 광양, 곡성, 구례, 벌교, 고흥   등, 전남 동부 5개 지방을 장악했다. 우리 군대가 초기 진압 작전에서 공산당(남로당) 반란군에  밀리자,   정부는 여수, 순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광주에 설치한 공산군토벌 전투사령부의 지휘로 제 2여단과 제 5여단 휘하의 6개 연대를 투입하여 소탕 작전을 폈다.

 

또, 우리 군대는 미국 군사고문단의 지휘 아래   장갑차, 박격포 등을 동원하여, 여수, 순천 남로당 반란 사건을 진압하고, 여수, 순천을 고생 끝에 탈환하였다. 살아남은 반란군은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공비가 되어, 하동, 광양, 구례, 함양, 산청 등, 5   개 군민을 괴롭혔다. 국민의 희생이 수백 명에 이르렀으며, 재산의 손실은 또한 얼마였던가?


미군의 협조로 남로당(공산당)의 반란은 진압되었으나 3개월 밖에 되지 않는 신생 대한민국 정부로서   는 충격이 컸다. 이에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제정과 대   대적인 숙군(肅軍)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이승만 정부는 강력한 반공 국가를 구축하게 되었으며, 이 사건 이후 미국은 군사지원을 훨   씬 강화하였고, 미군 철수도 서기 1949년 6월로 연기하였다.


제주 4.3 폭동 반란 사건과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가 되었다. 만약 당시    에 공산당을 색출하는 숙군(肅軍)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6.25 남침을 당했다면, 우리나라는 적화통일이     되었을 것이다.

 

남로당의 제주 4.3 폭동 반란 사건과 여수 14연대 반란사건, 대구 파업 및 폭동사건, 서울 정판사 사건(가짜화폐를 찍어 경제를 혼란시키려고 한 사건) 등을 통하여, 국민은 공산주의자들의 전술과 전략, 인간성의 상실, 자기와 한패가 아니면, 사람을 무참히 죽이는 살인마의 모습을 여실히 깨닫게  된 것이다.

 

평등을 부르짖고, 인민을 위한 공산 사회주의 국가를 이룬다고! 부자의 토지를 몰수하여 무상   으로 농민에게 나누어 준다는 등, 말과 선동은 모두 정권탈취를 위한 수단이었으며, 행동은 무지비한 살상과 착취를 감행하였다.

 

또한, 여수 순천에서 14연대와 반란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죽어간   남로당원들이여! 공산 반란군들이여! 당신들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은 공산당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공산당인 남로당에게 희생당하신 분들 때문에, 살아남은 국민은 공산당의 정체를 분명히 알게 한 사건이었다.


공산당에게 희생당한 분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우리 국민은 늦게나마 깨닫고, 고개 숙여 명복을 빌며, 감사를 드립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장악한 오늘의 주사파, 종북파인 공산주의자들   의 언행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 것인가?


우리의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남을 탓하기 전에 방심했던 지난날,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자기의 잇속만을 챙긴 지도자들과 국민, 이들을 뽑아주고, 부정부패를 방관한 나 자신을 돌아   보고 반성하며, 잘못을 깨달아 전화이복(戰禍以福)을 이룰 각오를 다져야 할 것이다.


역사는 반전(反轉)한다. 추운 겨울이 오래 계속되는 것이 아니듯이, 악의 세력이 아무리 크고 무섭다고   해도, 악(惡)의 양(量)이 차면, 천벌(天罰)이 내린다. 천벌은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과 자손에게까지 재앙    (災殃)의 업보(業報)가 내린다.

 

악(惡)이란 거짓으로 자신과 하느님과 국민을 속이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남의 것을 빼앗고, 남녀의 사랑을 빙자하여 음란하고 불륜을 행하며, 여러 가지 도구로 남을 다치게 하고, 상하게 하여 죽이고, 어둠을 틈타 남을 음해(陰害)하고,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와 자연의 순리를 역행(逆行)하는 것이다. 누구나 이러한 악과 어둠에서 깨어나기를 권고(勸告)해 본다.

 

                                    (사)국사바로알기중앙회(02-978-9728)
                                   한국상고역사연구원 원장 송 부 웅(宋 富 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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